참고문헌
<아도르노의 경험의 반란>, 이병탁
①진단 / 목표
아도르노의 사상은 다음의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상 어떤 철학도 심지어 극단적 경험론조차도 순수 사실을 머리채를 붙잡듯이 끌고 갈 수 없으며 해부학의 사례들이나 물리학에서의 실험들처럼 나타낼 수도 없다. 어떤 철학도 많은 회하들이 매혹적으로 속여 믿게 하듯이 개별 사물들을 텍스트에 붙여 넣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에 반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두 주장은 그의 문제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별 사물들을 텍스트에 붙여 넣을 수 없다.’는 말 속에는 언어와 기호가 자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무엇보다 사물의 이름이 추상화 원리를 거쳤기 때문에 사물 그 자체와 필연적인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하여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가 경계한 것은 이성 중심의 주체를 필두로 한 ‘동일성 원리’이다. 이 동일성 원리에 의해서 오랫동안 객체(자연 또는 피지배자)의 비동일적 요소들은 제거되었고 17, 18세기 계몽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그러한 원리를 기반으로 한 과학과 철학은 객체와 주체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동일성 원리’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배제의 논리’에 대해 비판하며 ‘비동일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즉 ‘진정으로 동일성 원리의 이상이 실현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성부터 설명해야 하겠다. 그는 주체와 객체는 불가분적으로 상호성을 가지며 그러한 이유는 이성이 주체인 점에 있어 육체는 객체이다.
살아있는 인간은 이러한 육체가 이성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데 기본적인 욕구의 근원은 바로 이 객체이며 이 ‘육체적 욕구’는 아도르노가 모든 진리의 조건이라고 말한바 주체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하며 또 다른 객체(자연)로부터 오는 충분한 양분을 공급받아야 제대로 사유할 수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한)이성은 육체와 상호성을 갖는다. 이것은 이성 그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며 더욱이 그러한 이성이 구성한 개념은 순수할 수 없다. 따라서 각각은 서로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
이처럼 개념 형성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경험’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데 완전히 고립된 주체 스스로는 어떤 개념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증명했듯이 이 주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순수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 그 자체를 개념과 완벽하게 대응 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 내에는 합리성 요소와 미메시스적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도르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성 원리와 그 작동원인으로서의 합리성의 전면 부정이 아니라 기존에 동일성 원리에 담겨있던 배제의 논리를 제거하고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사태(situation)나 사물의 비동일적 요소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동일적 요소들이 환원 불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풀어내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을 그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도르노가 배제의 논리를 제거하고 그동안 배제되었던 비동일자의 존재를 표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konstellation’(성좌)와 ‘예술(Aesthetics)’이다
②방법 – 성좌(Konstellation), 예술(Aesthetics); 전율(Schauer)
여러 별이 모여서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듯 (순수 체험적 요소에서의)경험과 직관적 관념들이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며 경험과 관념이 독립적인 도식이 아니고 개별적 주체 앞에서 이미 선행된 역사를 통해서 축적된 산물로서의 도식이기 때문에 변화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으며 논리학자들이 개념 형성에 있어서 제1원리로 삼는 ‘영원불변성 또는 항상성’은 무참히 깨진다.
즉 정리된 형태로서의 긍정성은 희박한 가능성으로서만 주어질 뿐이고 그것은 부정적 변증법을 거친다. 즉 하나의 별자리는 그 자체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기 힘들다. 여러 별이 함께 모였을 때만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규정하고자 하는 사태 주위에 개념들을 집중시켜 함께-배열함으로써 동일성 개념이 잘라버린 개념의 잉여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의도한 바는 개념의 단적인 규정은 그것의 비동일적 요소들을 전부 동일성 요소로 환원시킬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개념들을 함께-배열함으로써 상호보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지향점으로서의 도달해야할 어떤 구체적인 상태로서의 방법이 아니라 사태나 사물의 규정에 있어서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시간 즉 역사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하나의 긍정적 완성을 이룰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이다.
이에 대해서 아도르노의 사상은 어떠한 지향점도 없이 맴도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도르노의 미학이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개념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비개념적인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자 규정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이미지인데 따라서 미적 경험은 모든 교환 가능하다는 합리성에 대한 부정이자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미메시스적 요소의 도피처이자 표현의 장인데 미메시스적 요소란 의식적 개념이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비개념적 요소로서 예술은 이러한 것들이 이미지로 표현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가 철학에서 미학으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의 보완물로 해석되는데, 미학의 대상이 규정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하면서도 그 때문에 예술은 철학의 해석을 필요로 해야 하며 철학은 예술의 진리 내용에 의존하게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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