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6월, 피카소는 파리에 머무르며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화상으로, 현대 미술의 3대 거장인 세잔, 피카소, 마티스의 첫 번째 전시회를 기획했다. 또한 파리에서 처음 가진 반 고흐의 대규모 전시회와 마네의 소묘 유작전도 볼라르 갤러리에서 열렸다.- 덕분에 피카소는 처음으로 프랑스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시인 막스 자코브와 우정을 쌓게 된다. 같은 해, 2월에 죽은 친구 카사헤마스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과 함께 그의 청색시대(어둡고 격렬한 색조를 사용하며 청색을 기본색으로 주제에 담긴 사실주의적 요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던 시기)가 시작된다. 엘 그레코에게 영향을 받은 이 화풍은 바르셀로나에 머물며 더 발전했다.
1904년 그는 다시 파리에 정착해 몽마르트 언덕의 세탁선이라는 곳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이 건물은 원래 낡은 공장이었는데, 주인이 수많은 작업실로 개조하여 헐값에 내놓았다. 몽마르트 언덕에는 이와 같은 작업실이 밀집해있었다. 라팽 아질이라는 카페도 있었는데 툴루즈 로트렉을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오갔다. 여기서 피카소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나고, 그를 통해 앙리 루소를 소개받았다. 이 근처에는 서커스 공연이 열리곤 했는데 피카소는 이를 장밋빛 시대(다양한 색조의 변화가 나타나며 서커스나 곡예사의 생활을 소재로 새로운 조형적 밀도를 지니는 화풍) 그림들의 주요 소재로 삼는다. 1905년 그는 이 시기의 작품 2점을 베네치아 비엔날레 스페인관에 전시했지만 공인된 경향만을 좇는 비엔날레 책임자 때문에 며칠 동안만 전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피카소는 이후 몇 년간 어떤 공식전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1906년 어느 가을, 야수파 화가인 마티스가 구입한 아프리카 조각을 본 피카소는 ‘흑인미술’에 빠지게 되고, 1907년 여름 내내 트로카데로 인류학박물관과 파리 인류학박물관을 수차례 드나들었다. 수많은 습작과 예비 데생을 거쳐 입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제작한다. 이 대작은 오랫동안 작업실에서만 보여졌으며, 공식적으로 전시가 된 것은 1916년 앙드레 살몽이 기획한 프랑스 근대미술전이었다. 이 작품의 충격적인 인상은 처음 감상한 세탁선의 친구들의 입소문을 타고 야수파 화가로 상당한 명성을 누리던 조르주 브라크에게까지 전해졌다. 브라크는 이 그림의 격렬함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곧장 <대공의 성모>를 제작하여 응수한다. 이때부터 브라크와 피카소의 꾸준한 만남이 이어진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아프리카 조각의 종합적 성격과 색채에 대한 세잔의 특별한 감각을 기준 삼아 그림의 표면을 색면으로 환원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런 회화들은 1912년까지 지속되는 ‘분석적 입체주의’ 양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1909년 피카소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갔다 돌아와서 세탁선을 떠나 보다 부유한 구역에 있는 클리시 대로에 정착한다. 이는 입체주의의 참신함에 매료된 애호가가 꾸준히 늘면서 생활이 윤택해졌다는 신호였다. 파리에 도착하자 베르트 바일, 볼라르를 비롯한 화상, 미술평론가 빌헬름 우데, 화랑을 운영하는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 등과 접촉했다. 든든한 수집가였던 미국인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과 교류하며 마티스를 만났고, 그녀가 소장한 세잔의 작품들을 연구할 수 있었다.
1911~1912년 경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피카소도 혁신적인 성과를 위한 실험을 감행한다. <등나무로 엮은 의자가 있는 정물>에서 처음으로 현실 세계를 확대 적용하기 위한 요소로서 콜라주를 활용한다. 이것을 아상블라주 기법으로 발전시켜 <기타>연작을 제작한다.
변화를 좋아하고 개성이 뚜렷했던 피카소는 색채의 즐거움을 다시 찾았다. 점묘법의 터치를 끌어와 캔버스에 활기를 불어넣고 구성의 엄격한 관념적 성격을 완화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많은 것들이 변했다. 피카소는 아비뇽으로 피신을 갔지만 브라크는 전선으로 떠났다. 스페인 시민이었던 탓에 징병되지 않은 피카소는 기피자로 여겨지며 입체주의의 평판 역시 180도 달라졌다. 어려워진 형편을 만회하려고 10월 파리로 돌아와서 유희적인 색채를 사용하는 정물화와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기하학적인 엄격함은 약해지고 형태의 해체는 계속 이어져 입체 조형 제작에 열중하기도 했다. 주위에서 일어난 전쟁의 비극은 그의 생활에 깊이 각인되었지만 작품들에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피카소는 1915년 알게 된 장 콕토의 소개로 1916년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발레 뤼스의 무대장식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공연 준비를 위해 폼페이와 나폴리를 거쳐 로마로 여행을 갔다. 이때 처음으로 그는 폼페이의 프레스코부터 라파엘로의 바티칸 궁 그림까지 지중해 고전주의의 뿌리를 목격한다. 이 새로운 영향의 증거가 공연을 위한 무대장식에 드러났다.
소재는 장밋빛 시대의 곡예사들이었지만 여행의 영향으로 인해 표현은 훨씬 고전적이었다. 1917년 파리에서 공연이 상연되지만 청중들은 독일을 지지하는 양식을 발견하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발레 뤼스와의 협업을 통해 피카소는 명성을 얻었고, 전후의 지식계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피카소는 전후 ‘질서로의 회귀’의 일환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을 계속 탐구했으며 이는 <해수욕하는 여인들>에서 구체화되었다. 1921년 제작한 <세 명의 악사>는 이전의 점묘화법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2차원적인 색면 중첩만으로 화면이 구성된 종합 입체주의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장식적인 채색을 지향함으로써 입체주의의 원리를 뛰어넘기 위한 행보는 <무용>이라는 대형 작품에서 절정에 달했다.
1920년 취리히에서 다다운동을 이끈 시인 트리스탕 차라가 파리에 정착한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앙드레 브르통은 자동기술법과 우연이라는 새로운 예술 창조 개념을 프랑스에 퍼뜨렸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결합한 이 개념들은 1924년 초현실주의 운동을 탄생시켰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피카소를 선구자이자 동반자로 여겼지만 실제로 피카소는 이성적인 분석을 지향했기 때문에 무의식을 창조의 원천으로 본 초현실주의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조르주 데 키리코는 피카소식의 해체와 재구성의 방법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35년에 젊은 마리 테레즈 왈테르가 아이를 갖자 올가와의 결혼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그는 처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느꼈고, 의기소침함을 벗어버리기 위해 자동기술법을 구사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스페인 공화국은 피카소에게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작품을 의뢰했다. 당시 젊은 사진작가 도라 마르와 깊은 관계였던 그는 사진 르포르타주에서 영감을 얻어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피카소는 의식적으로 분명한 양식을 보여주는 형식주의와 사회적 참여가 양립하는 20세기의 새로운 장르에 뛰어들었다.
<게르니카>가 정치적 상황에 윤리적으로 관여하려는 피카소의 ‘기념비적’ 성향을 대표한다면 1939년 <앙티비의 밤 낚시>는 반대로 생명력으로 가득 찬 이미지 중 하나이다. 이는 그가 입체주의의 흔적을 뛰어넘는 시각적 쾌락주의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피카소의 회화에는 비로소 이중성이 공존하게 되었다. <게르니카>는 참여적 사실주의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쾌락주의적’작품에 나타난 형태의 분해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뿌리를 이루었다.
◇장년기
1901 6월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화랑에서 전시.
10월 청색시대의 시작 ( <압생트 마시는 여인>, <하이메 바르테스의 초상>)
1904 몽마르트 13번지 ‘세탁선‘에 자리를 잡다
1905 장밋빛 시대가 시작 (<배우>), 마티스와 만남
1907 아비뇽의 처녀들 제작
1912 처음 콜라주 기법을 사용해 <등나무로 엮은 의자가 있는 정물>을 제작. ‘종합적 입체주의’등장, 아상블라주 작품 <기타> 연작 제작.
1915 에릭 사티, 장 콕토와 교류
1918 올가 코흘로바와 결혼
1919 디아길레프와 발레 ‘풀치넬라’작업
1925 최초의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여
1937 <게르니카> 제작
*당시의 파리 상황 : 유럽 예술 혁신의 중심지;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탄생하고 발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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