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10월 25일 밤 11시 15분에 말라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재능이 특별나지 않는 화가였고, 어머니의 조상 중에는 화가가 두 명있었다. 산파는 피카소가 숨을 쉬지 않자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가 입에 시가를 물고 아이 얼굴 한가운데로 훅 불어 기침을 하게 하여 살려냈다.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죽음과 대면했던 피카소는 아흔 살을 넘기고도 놀라울 정도로 활동적일 정도로 생명력이 대단했다.
-태어나 10년 동안 고향 말라가에서 성장했다. 이 기간 동안 아버지의 수입은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치 못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보수가 더 높은 직업을 갖기 위해 스페인 북부로 간다. 피카소 가족은 이후 4년을 대서양에 인접한 지방 주도 라 코루냐에서 보낸다.
-피카소는 수학 시간에 수학의 원리나 계산보다는 선생님이 칠판에 숫자를 어떤 모양으로 쓰는지 더 흥미로워했다.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열 세살에 벌써 아버지의 미술 수준에 도달했다. 피카소가 회고하기를 “아버지는 내 손에 물감과 붓을 쥐어주시고는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못다 그린 자기 그림에 비둘기의 발을 채워 넣으라고 했다. 피카소가 아버지의 말대로 비둘기를 그려넣자,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깃든 성숙한 미술가의 면모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화구를 모조리 피카소에게 줘 버렸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이 일하는 베르셀로나의 라 론하 미술학교에서 바로 고급반 수업을 듣게 하려했다. 그러기 위해서 피카소는 한 달 안에 고전미술과 정물화를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야 했다. 그런데 피카소는 포트폴리오를 바로 다음날 제출했다. 그럼에도 그의 포트폴리오는 이미 적잖은 수업을 받았던 그 어떤 학생의 작품보다 월등했다. 그는 신동이었던 것이다. 그는 미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바르셀로나의 주목받는 화가로 인정받는다. 그가 그린 <첫 영성체>는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가장 중요한 전시회에 걸렸다.
피카소는 여름을 고향 말라가에서 보낸 후 1897년 마드리드의 새 작업실에 정착한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산 페르난도 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장차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데는 프라도 미술관의 역할이 컸다. 그는 수시로 그곳에 가서 옛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고 기법을 흉내냈다. 이 대가들의 작품은 말년의 피카소가 모델로 삼은 유일한 주제이자, 자유롭고 끊임없는 변주의 대상이었다.
-피카소는 6월 초 성홍열에 걸려 치료를 위해 바르셀로나로 돌아온다. 그는 이 즈음에 아카데미즘이나 집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피레네 산맥의 산골 마을 오르타 데 에브에 머무르는 시간을 갖는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와서는 스페인 미술계의 새로운 경향에 취해 이 경향을 대표하는 화가들을 만난다. 이들은 카바레 ‘네 마리 고양이’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카소는 이 곳에서 루시뇰이나 노넬과 같은 모더니스트를 만난다. 피카소는 이 때 선배 화가들에게서 재능을 인정받아 1900년에 벌써 예술가들의 카바레 전시공간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새로운 미술 경향에 대해 관심이 대단했던 피카소는 당시 미술계를 선도하던 파리로 가기로 결심한다. 피카소는 파리라면 열정적인 자기 기질과도 부합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로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파리는 그의 예술적 실험에 꼭 필요한 개방적 정신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에게 매료되고, 폴세잔과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을 화랑에서 발견하였다. 젊은 화랑 경영자 페드로 마냐크는 피카소의 그림에 매혹되어 계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피카소는 금전적 문제를 벗어나 파리에 머무를 수 있었다.
피카소는 잠시 스페인에 머물렀지만, 잠시뿐이었다. 피카소의 부모는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의 방랑과 과격한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피카소는 가족 관계가 순탄치 못했다. 이 즈음에 피카소가 편집장으로 있던 미술잡지도 폐간되었다. 그는 1901년 5월, 다시 파리로 간다.
(앞부분은 흥미로운 그의 스토리 몇 개를 발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초년기 전체적인 정리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피카소는 화가로서 탄탄한 기반을 다지러 미술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이미 열여섯 살에 미술학교에서 배울 것은 모두 배웠다.(H-creativity 달성) 스페인에서 가장 현대적이 화가가 되기로 한 그의 꿈은 유년기에 벌써 도달하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파리 뿐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보낸 1년간 혁신적 미술경향을 모조리 섭렵한다.
유년기와 장년기의 경계에서 그는 아직 자신의 양식을 찾지 못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압생트 마시는 여인>이다. 그림 속 여인은 혼자 테이블에 앉아서 앞에 놓인 술잔과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아직 우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면서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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