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철학사』, 풍우란 저, 정인재 역. 형설출판사 1947
3)제도와 도덕
곽상은 천지를 계속 변화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래서 《곽주》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체로 힘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힘이 센 것은 변화다. 그러므로 천지는 번쩍 들어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며, 산악을 짊어지고서 낡은 것을 벗어 던진다. 그러므로 잠시도 쉬지 않고 곧 새것을 섭렵한다. 천지 만물은 때에 따라 옮겨가지 않음이 없다. [세계가 모두 새롭다. 그런데 스스로 옛 것으로 여긴다. 배舟는 날마다 모습이 바뀌어 가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엔 옛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산은 날로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있지만 눈으로 보기엔 앞서 본 모습과 같다.] 이제 한 번 팔을 엇갈려 만져보니 없어졌다. 모두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진다. 조금 전의 나는 결코 지금의 내가 아니다. 나와 현재 이순간은 다 가버렸는데 어찌 늘 옛 것만 지키고 앉아 있겠는가?”
《장자: 대종수 6》 (→순환성을 깨버린다는 의미에서 중국철학의 전반적 도식에서 탈피함)
사회도 역시 언제나 유동하는 상태에 있으며 인간의 요구도 언제나 변화 중에 있다. 어떠한 시대에 잘 적용되었던 제도와 도덕이 다른 시대에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장자주》에 다음 구절이 있다. “ 대체로 선왕의 전례는 당시의 요구에 맞추어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갔는데도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백성을 괴롭히는 요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바로잡을 단서를 일으켰다.”《장자; 천운14》
“성인의 업적이 이미 빛나게 드러나 버리면 그 순간 인의가 참되지 못하고, 예악은 그 본성과 떠나 거리가 생겨 단지 겉껍데기만이 있게 된다. 성인도 이와 같은 폐단이 생기거늘 나 같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장자; 마제9》
사회는 환경과 더불어 변화한다. 환경이 변화하면 제도와 도덕은 그와 함께 변화하여야 한다. 만일 제도나 도덕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인위적인 억지가 되고 사람을 괴롭히는 유령이 된다. 새로운 제도나 새로운 도덕이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 것과 낡은 것은 낡은 것 대로다.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느 것이 훌륭하다든가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곽상은 제도나 도덕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노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현실에 합당하지 못한 제도와 도덕을 반대했을 뿐이다.
4)유위와 무위
곽상은 원시도가의 자연과 인간, 유위와 무위에 관한 사상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부가하였다. 사회상황에 생길 때 새로운 제도와 도덕은 자동적으로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이 저절로 생기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바로 자연에 따르며 ‘무위’에 따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하고 이미 그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을 고수하려 드는 것은 인위적이요 ‘유위’적이다.
“대체로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 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작은 것은 작은 것끼리 큰 것은 큰 것끼리 모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대세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텅비어 사사로운 정이 없으면 그에겐 여러 가지 지혜가 창고처럼 모일 것이다. 한 지도자가 이러한 시대조류의 모임을 이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단순히 그 시대의 지혜에 맡겨 환경의 필연성에 따라 세상인들이 스스로 보살피게 놓아둘 뿐이다.”
《장자 ; 대종사6》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활동에서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그리고 자유롭게 행사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이것은 ‘무위’다. 그렇지 못하면 ‘유위’다.
“대체로 훌륭한 기수는 자기의 말馬이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도록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말 스스로에게 맡겨 두는 데 있다.…만일 둔마나 천리마의 힘에 맡겨 두고, 천천히 가든가 빨리 달리는 분수에 맞추면, 설령 사막의 황무지를 누빈다 하더라도 여러 말들의 생명은 보전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말의 성질에 맡겨 둔다는 소문을 듣고, 내버려 두고 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위의 풍문을 듣고 걷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장자의 취지를 너무도 잘못 알고 있다.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장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곽상이 장자를 주석함에 있어서 분명히 고도의 순수성을 발휘하였다. 곽상 역시 초기도가의 단순과 소박한 사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만일 이지러지지 않은 것을 순수하다고 여기다면 여러 행사가 동시에 거행되고 많은 변화가 나란히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지극히 순수하다. 만일 섞이지 않은 것을 소박이라 한다면 용의 문채, 봉황의 맵씨는 그 아름다움이 볼 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극히 소박하다. 반면 만일 자연 바탕을 보존하지 못하고, 무엇을 섞어 겉으로 꾸민다면 아무리 순수한 개‧염소의 가죽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것을 순박하다 할 수 있을까.”《장자; 각의15》
5)지식과 모방
노자와 장자 두 사람은 다 세상 사람이 보통 성인이라 여기는 그러한 사람을 반대했다. 그러나 곽상은 성인이 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모방하는 것을 반대했다.
“지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지식이라 이름붙인 것은 알맞은 정도를 잃은 데서 생겨났고 아무도 모르는 끝에서 사라진다. 아무도 모르는 끝이란 자기의 지극한 분수에 맡겨 털끝만큼의 무게도 더함이 없다. 그러므로 만근의 무게를 짊어져도 참으로 자기의 능력에 알맞으면 홀연히 자기 몸에 무거움을 알지 못한다.”《장자; 양생주3》
만일 지식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플라톤이나 장자 어느 사람도 어떤 지식을 가졌다고 간주할 수 없다.
지식을 가진 자는 남을 잘 배우는 자일뿐이다. 그런데 곽상은 배움을 세 가지 이유로 나쁘게 보고 있다.
첫째 배움은 무용하다.
“옛날의 일은 이미 옛날에 사라졌다. 비록 그것을 전한다 하더라도 어찌 옜날 것을 오늘날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겠는가? 옜날 것은 오늘 날에는 없다. 그리고 오늘 날의 일도 변화 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것을] 배우는 것을 끊어버리고 우리 본성에 따라 행하여 시대와 더불어 변화한 후에야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장자; 천도13》
→이렇게 따지면 사회 제도(명교)가 무슨 소용인가?
만물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 매일 우리는 새로운 문제, 새로운 요구,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상황과 문제와 요구에 대처할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심지어 어느 주어진 한 순간에 있어서조차 그 상황과 문제점과 요구가 각자마다 다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법 역시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남의 것을 배우기만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둘째로 남을 배우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장자주》의 한 구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욕정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이루(위대한 미술가)나 사광(위대한 음악가)이 되려고 노력하였지만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루나 사광은 욕정이 없었기 때문에 눈과 귀가 남보다도 예민하였다. 욕정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성현이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현은 욕정이 없기 때문에 성현이 되었다. 어찌 다만 성현이 되는 길은 절대적으로 멀며 이루나 사광이 되는 길은 사모하기 어려운 것인가? 비록 바보나 장님‧벙어리‧닭울음‧개짓는 소리라 할지라도 어찌 욕정을 가지고 그것을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역시 끝내 할 수 없을 것이다.”
《장자; 도충부5》
만물은 자기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발휘해야 한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는 될 수가 없다.
셋째, 남을 배우는 것은 해롭다. 《장자주》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기의 본성에 그치지 못하고 자기 밖에서 끊임없이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밖에서 구할 수 없는데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동그라미를 가지고 네모를 배우고 물고기가 새를 사모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이것이 저것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실과는 더욱 멀어지며 더 많이 배워 얻을수록 더 본성을 잃는다.”《장자;제물론2》
“이루의 그림과 사광의 소리는, 눈‧귀 있는 자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생명을 받은 것은 분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남이] 귀하다고 여기는 바를 가지고 [자기] 삶을 이끌어 가면 그 생명은 잃어버린다. 만약 귀하다고 여기는 바를 허물어뜨리고, 남을 버리고 나에게 맡긴다면 눈‧귀 밝음이 각기 온전히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참됨을 함유하게 될 것이다……. 만물이 각각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바가 같지 않는데 익힌 바를 감히 달리할 수 없다면, 교묘한 것 같지만 치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쓰는 자는, 네모난 것은 네모나게 하고, 동그란 것은 동그랗게 하여 각자가 그 자기가 할 수 있는 바에 맡기면 사람은 본성을 평안하게 여길 것이다.”《장자; 거협10》
남을 배움으로써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할 뿐만 아니라, 또 남을 배움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남을 배우는 것이 해롭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배움은 무용하고 효과도 없고 또 해롭다. 오직 인생의 의미 있는 생활양식은 ‘자기 본성에 따라 사는 일任我이다. 이것이 또한 ’무의‘를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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