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이전 철학에 대한 비판과 그 이후의 영향에 대해
1.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515?~B.C445?)의 사상과 질문
그의 단편들은 표현상에 있어서 많은 의문들을 가져왔다. 필자는 그가 제시하는 사상과 더불어서 그의 가르침 속에 명확히 드러나거나 그렇지 않은 문제들(필자가 생각하기에 문제되는 것들)을 제시해보고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시해 보았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와 인식으로 대표되는 서양철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의 가르침은 서사시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시 속에서 그는 여행자가 되며, 여신은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의 직접적인 전달자이다.
그러나 여신의 입을 말하는 신화적인 표현상의 문제는 과연 그가 인식에 관한 선구자가 될 수 있었는가 의구심이 들지만 신에 대해 말하거나 신의 입을 통해 얘기하는 표현 방식은 그 당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습이라고 여기고 넘어가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과연 파르메니데스가 전하고자 했던 사유에 관한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편2‘자,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있는지.’(1~2행)에서 알 수 있듯이 사유를 위한 길들이며 이 길은 ‘하나는 있고 있지 않을 수 없다는 길’과 ‘있지 않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길’로 나누어진다.
그는 후자에 대해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단편8.17행)라고 했는데 왜 그는 사유될 수 없는 길이라면서 참되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더불어서 무엇인가의 참 거짓을 판가름 한다는 것은 사유를 필수적으로 내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은 아마도 ‘참된 길은 오로지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참된 길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라고 확정된 것이 아니라 ‘아직 참된 길인지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그 자체로서는 참 거짓이 판명되어 있지만 해결되지 않은 수학적 가설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참 거짓을 알 수 없다.) 또한 이와 더불어서 ‘가사자들은 있음과 있지 않음의 두 길 사이에서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으로, 같지 않은 것으로 통용되어 왔다’(단편6.8행)고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가사자들은 있지 않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의 단편들에 나타나는 주장들과 모순이 없도록 하려면 이 부분을 ‘가사자들은 있음과 있음 사이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른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있음과 있지 않음을 혼동하는 것이 통용되어 왔다.’고 표현한 것이 아마도 감각적인 존재에서 우주의 근원을 찾는 그 이전 철학자들이나 그렇게 여겼던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지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전자의 있음의 길에서 논의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데 '있다(estin).'는 영어의 is인데 이를 ‘-이다’라고 보아야 하는지 ‘-있다’라고 보아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그에 대해 필자는 ‘-이다’라고 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다’가 성립되려면 적어도 a와 b라는 2개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즉, 그 안에 ‘-있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존재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르메니데스가 단편2에서 ‘있지 않다는 길은 전혀 배움이 없는 길이다’라고 했듯이 무엇인가의 배움에 의미를 두기에 단순한 존재의 있음보다는 -임으로 estin을 해석하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그와 반대되는 ‘-이지 않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지 않다.’는 것은 ‘-이다’에서와 같이 일단 a와 b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전제로 두 명제를 살펴보자.
①a는 b이지 않다. ②a는 c이다.
①은 ②에 비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배움’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우리는 ①을 통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가. a는 b가 아니라는 것은 a가 c이거나 d또는 e…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며 이것이 너무 광범위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x는 3보다 크거나 같지 않다.’고 했을 때, 과연 우리는 이 명제가 내포하고 있는 ‘x는 3이 아니다’라는 것이 의미 없다고 여길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답해보면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있음과 -임’은 -임이 있음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연결지어서 생각해도 상관이 없지만 ‘이지 않음’과 ‘있지 않음’은 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서 -임의 대상과 그 대상의 특성은 무엇인가. -임 속에 있는 있음의 대상은 단편4, 6에서 알 수 있듯이 있는 것끼리는 지성으로서 붙어있는 것이며 모든 곳에 퍼져 있고 또한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임의 대상은 말과 사유의 대상이고 따라서 -임은 말과 사유이다. 그 특성에 관해서는 단편8에서 알 수 있는데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3~4행)에서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편8의 12행과 28행에서 생성과 소멸이 없는 이유를 말하는 데에 모순된 것이 있다. 12행에서는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그 이외의 것이 생겨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디케는 족쇄를 풀어 소멸하도록 하지 않았고.’라고 표현하면서 생성자체에 대해서 거부하지만 28행에서는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생성과 소멸이 쫓겨났다는 표현을 씀으로써 원래는 그것이 있었던 것이라고 묘사된다. 이 표현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성과 소멸을 주장해왔던 앞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즉, 생성과 소멸이 원래는 있었는데 없어진 것이 아니라 생성과 소멸을 예부터 주장해왔지만 그렇지 않다고 논박 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는 설득을 위한 논변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설득을 위한 말(logos)은 단편1부터 강조되는데 ‘처녀들이 부드러운 말로 그녀(디케)를 달래면서 영리하게 설득했다.’(15행), ‘설득력 있는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과’(29행)에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단편7‘다만 나(여신)로부터 말해진, 테스트를 논변으로 판가름하라’(5행)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여신의 말조차 논변을 거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논변과 앞에서 살펴본 사유함의 근원은 지성(누스)인데 이 지성은 무기력함이 지배할 때 가사자들의 길로 가게 되지만(단편6.5행),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것들을 지성으로 확고하게 바라보라고 한다.(단편4.1행) 이는 위에서 살펴본 있음의 특성과 관련하여 지성이 그것을 확실하게 해주는데, 즉 있음과 있음 사이에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있는 것을 있는 것에 붙어 있게 하고 질서에 따라서 모든 곳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을 종합해 본다면, 있는(-인) 것이란 사유함과 말함이며(단편8.24행, 단편16) 이것들은 필연과 운명의 속박 속에서 부동이며 시작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것이란 사유함과 말함의 반대되는 것 즉, 감각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속성과 더불어서 ‘-임’의 대상은 2:4=4:8과 같은 자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2:3=4:6이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각각은 필연적으로 참이며 ‘(이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개념들을 공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들을 붙어있고 퍼져있는 것이라고 하는 표현 방식을 빌린다면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은 이것이다. 즉, 2:4=4:8이라는 명제 와 2:3=4:6이라는 명제는 둘 다 반드시 참이지만 두 명제는 하나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명제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게 되는가?
있음과 있음 사이에 경계를 부정한 그의 말에 따른다면 이 둘은 같아야 하지만 2:4=4:6이라는 명제는 명백한 모순이기에 그럴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의 단편들을 가지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 문제는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그 이전 사람들이 근원이라고 주장했던 감각적인 것들과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계를 확실하게 구분한 플라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문제(사유하는 것과 감각하는 것을 단편 자체에서는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때 확실히 구분을 하지 못하는 문제)라고 치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비판
밀레토스 학파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로 구성된다. 먼저 탈레스는 물이 아르케(근원)라고 하면서 물을 우주의 근원이자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에게 물이란 상태는 변하지만 실체는 영속하므로 근원이라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도 소멸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DK11A12)
그리고 이 물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생겨나며 그런 의미에서 물로 이루어지고 또한 소멸한 뒤에는 물로 되돌아간다고 보았다. 그가 물을 근원으로 생각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아마도 모든 것의 자양분이 축축하다는 것과, 열 자체가 물에서 생긴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의해 생존한다는 것을 보고서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뿐 아니라, 모든 씨앗은 축축한 본성을 갖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그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물을 근원으로써 삼았다는 것이다.
사유와 말함의 중요성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따른다면 ‘물’자체는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점에서 ‘있음’과 상통하지만 그것이 감각되는 존재로써 결코 우주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낙시만드로스는 근원을 아페이론(무한정자)이라고 하면서 탈레스의 근원인 물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인 ‘대립되는 것의 생성’을 해결했다. 즉, 물과 같은 것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기란 상식적으로도 힘들기에 무한정자를 그 근원으로 삼으면서 대립자들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담고 있으며 이로부터 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DK12A9) 그러나 만물이 생성되는 원리를 영원한 운동에 의해서인 것으로 본다.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따른다면, 그는 탈레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무한정자는 ‘있음’과 비슷하지만 무한정자로부터 생성이 있고 또한 이것들은 다시 소멸한다는 점에서 무한정자는 결코 우주의 근원으로써 삼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우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기를 존재론적 근원으로 삼으면서 아낙시만드로스가 주장했던 무한정자가 해결하지 못한 점을 어느 정도 해결한다고 할 수 잇는데, 그것은 바로 공기라는 원소가 근원이자 원리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무한정자는 그것이 특정한 원소나 존재라기보다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카오스와 같은 것이고 회전하는 운동에 의해 생성이 있을 뿐이지만 아낙시메네스의 공기는 희박화와 농축화라는 구체적인 운동 원리에 의해 존재를 생성한다.(DK13A5)
하지만 있음은 완결된 것으로서 꽉 차 있고 부동한 것이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의 운동은 다른 빈 공간을 전제할 수밖에 없게 된다.
3.이후 자연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그 이후에도 많은 자연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서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게 준 영향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엠페도클레스는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될 수 없으며 비존재로 소멸할 수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DK31B11이하) 또한 근원적 질료를 네 원소 즉, 불, 물, 땅, 공기로 두고서는 그 원소들은 그 고유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혼합과 분리를 통해서 다른 부차적인 것들이 나왔다고(여기서 나왔다는 개념은 생성의 개념이 아니라 네 원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성질들의 결합의 의한 만들어짐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보며 또한 네 원소가 결합하는 원리를 사랑과 불화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현상들을 멸시하다시피 하면서 제시하지 않았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그 나름대로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도 생성과 소멸을 부정하면서 근원의 영구한 존속을 주장하는 데 엠페도클레스와 다른 점은 그가 근원들을 무한정한 씨앗으로 보며 그것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생기고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다르게 그는 지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섞인 것들이며, 이것만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질이며 미세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을,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했다. 필자의 생각에 이 부분은 그가 지성을 특별하게 놓는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지성을 논변과 사유의 근거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이 외에 아낙사고라스가 물질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DK59A43)고 하면서 지성을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물질로 본 것은 모순적이다. 보고서의 형식상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기로 하지는 않겠지만 생각해볼만하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개념을 차용하긴 하지만 개념이 가리키는 바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꽉 찬 것과 허공을 원소들이라 말하며, 전자를 있는 것, 후자를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이것들 중에서 꽉 차고 단단한 것을 있는 것이라고 하고, 비어 있고 성긴 것을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허공 자체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허공의 상태를 인정함으로써 움직임의 원인을 설명했다.
또한 꽉 찬 것들을 이루고 있는 근원을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원자’라고 함으로써 허공 때문에 생기는 운동으로 인해 성질이 다른 원자들이 만나게 되고 또 떨어지게 됨으로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DK67A7) 그들의 원소 개념은 아낙사고라스와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감각으로 관찰되는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한정적인 원소와 허공을 상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것과 사유하는 것을 구분한다고 하면서 ‘-있음’의 특성과 성질들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감각과 사유의 구분을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플라톤에 이르러 ‘이데아’의 개념을 통해서 감각과 사유의 완전한 구분이 이루어지는데, 파르메니데스의 ‘사유’를 ‘이데아의 세계’와 연관시키면서 감각되는 것들은 모두 허상이며 “올바른 ‘사유’를 통해서만 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프리도 릭켄. 『고대 그리스철학』김성진 역
W.K.C. 거스리 『희랍철학 입문』박종현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7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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