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YK,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후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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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후설) - 1

by MarvelKim 2019. 4. 16.

 

 

 

후설-현상학에 나타난 경험적 자아와 선험적 자아

-의미 변용에 있어서의 두 가지 구분을 중점으로-

 

 

 

후설-현상학(이하 현상학)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내비치는 역설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모든 기초는 의심해 볼 수 있어도 인식 또는 생각하는 이성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듯이(더욱이 의심할수록 더욱 뚜렷해진다.) 현상학은 그 환원의 기초 단계인 판단중지(에포케)에 있어 이전 철학적 이념을 포함한 여러 관습적인 이념들을 괄호 치기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그 자체는 판단중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설 자신은 자신의 현상학 또는 현상학적 환원들이 어떤 종결점에 도달하거나 또는 환원들 통해 대면하게 된 선험적 자아나 세계가 데카르트의 신-관념이나 자아관념과 같은 어떤 원초적인 하나의 지침서로 작용하길 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에포케에 대한 에포케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현상학은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의 학문으로서 현상학 자체가 자유로의 뚜렷한 이정표는 아니다.

 

따라서 다양한 그의 주장과 기록에 대한 다양하고도 어쩌면 유치할 수 있는 그러한 원색적인 질문들은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물론 원전에 기초한 현상학 본연의 텍스트를 기초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보고서는 전공자에 입장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런 질문들 속에서 (이 보고서가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아주 희박한 확률에 기대야 하지만) 기존의 여러 축()을 더욱 풍부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뒤흔들 기초로서 작용할 수도 있기에 미흡하게나마 보고서를 써 보았다.

 

1)들어가는 말

후설의 현상학(이하 현상학)은 그 저술의 성격상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들이 꼬리를 문다. 현상학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란 어떤 인습적인 경험적관념적심리-물리적인 학문이나 철학에서 벗어나서 자신이 생활 세계의 의미들을 구성하는 주체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나의 존재방식이 곧 세계를 드러내는 구조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의 출발점은 데카르트적 성철과 칸트의 인식론을 기반으로 하지만 결코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면서 데카르트와 칸트가 간과한 인식의 근원(선험적 주관성)에로 나아간다. 인식의 근원인 선험적 주관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함에 앞서서 어떤 점에서 그들의 주장을 비판했는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데, 먼저 후설은 데카르트의 철학적 회의를 환원 이전에 기초가 되는 판단중지로 차용하면서도 그의 고정적불변적인 이성을 비판한다.

 

기만하지 않는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인식 능력 즉 이성이란 회의를 거치면 거칠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으로서 존재 판명의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그러한 이성 너머에 있는 것을 분석하지 못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신학적 사유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신이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그것의 성격을 기술함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지 분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칸트에 있어서의 현상학적 한계점이란 주어진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자체는 항상 요청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확실하게 주어지는 것은 다만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 또는 구조일 뿐이다.

 

인간은 선천적선험적 형식인 감성과 오성은 시공간 그리고 범주를 통해 개념을 구성하고 선험적 종합판단을 하지만, 이미 물자체라는 장애물은 인식의 한계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인식과 인식 근원은 명확하지 못하다. 감성과 오성의 결과물인 인식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성또한 그것의 성격만이 제시될 뿐이며 이러한 인식의 구조(감성오성이성)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전달해주지 못했다.

 

현상학에 있어 인식되는 것은 사물 그대로의 상()이 아니라 대상의 의미이며, 의미 파악에 있어서의 노에마-노에시스 관계(지향적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선험적 주관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하는 도정이 환원이며 이를 위한 전초 단계가 바로 판단중지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이전 철학적 관념들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왜냐하면 현상학에서의 인간 의식 구조는 칸트와 같이 어떤 형식으로서 미리 주어진 것도 아니며 데카르트와 같이 신으로부터 창조된 본유 관념으로서의 불변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미리 주어진 것은 대상의 의미일 뿐이다. 의미 지각에 있어 우리는 이미 나 이전에 앞서-이해된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로크나 흄, 버클리와 같이 대상의 인상이나 관념만이 또는 관념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만이 단순하게 주어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태도 전환을 통해서 인간 의식구조의 근원을 밝히고자 함이 현상학의 1차 목표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앞서 밝혔듯이 인간의 (철학적) 자유이다.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이하 현상학)은 그 저술의 성격상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들이 꼬리를 문다. 보고서의 본 성격상 이러한 질문들은 의미 변용에 초점을 맞추어야함이 당연하지만, 초기 문제 설정과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분석 과정에 있어 전제로 삼는 다른 개념들에 대한 오해 때문에 비롯될 수 있는 문제들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비-일관적일 수 있는 질문들을 간단하게 또는 자세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질문들은 선험적 환원으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어서 판단중지와 환원, 그리고 자아에 대한 것으로 구성되며 본격적인 의미 변용에 있어서의 탐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루어졌다.

 

후설 현상학에 있어 거시적인 여러 개념들, 가령 상호주관성, 생활 세계, 발생 현상학, 이 아니라 의미 변용을 문제의 초점으로 정한 이유는 선험적 지평/영역에 도달한 자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의미 변용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이는 본론에서 그 수정과정을 통해 기술되어질 것이다.)

 

이미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의 개념의 양태는 그것이 글자라는 것 이외에는 전혀 관련이 없는 관계(-관련성), 불의 관계와 같은 속성적 대립관계, -11의 관계와 같은 개념적 대립 관계(대립성), 부모자식의 관계와 같은 인척관계, 책표지의 관계와 같은 구성관계 등 여러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선험적 영역에 이른 자아에 의해 일어나는 기술적 의미 변용(이하 선험적 의미변용)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두 부분 모두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으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것은 선험적 의미변용에 있어서 그것이 만약 종교적 교리의 변천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면 어떻게 교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서 의미변용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현상학적 방법론에 있어 그 기초가 되는 판단중지부터 시작해 위와 같은 (보고서 안에서의) 핵심적인 질문들을 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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