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ntent="user-scalable=no, initial-scale=1.0, maximum-scale=1.0, minimum-scale=1.0, width=device-width"> YK, 플라톤 '국가'의 세 비유를 중심으로 한 앎의 성격과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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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 플라톤 '국가'의 세 비유를 중심으로 한 앎의 성격과 체계

by MarvelKim 2019. 4. 7.

 

 

 

 

<국가>의 세 비유를 중심으로 앎(인식)의 성격과 체계에 관한 플라의 생각을 정리하라. 자신의 전공교과(철학과)에서 다루는 앎을 플라톤의 분류에 따라 위치시켜 보고, 그의 분류와 특징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라.

 

플라톤은 인식을 형상과 형상을 나누어 가진 것들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음은 어떤가? 이와는 반대로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이것과 이것에 관여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그래서 관여하고 있는 것들그것 자체로 생각하거나 또는 그것 자체관여하고 있는 것들로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 자네에겐 깬 상태로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아니면 이 사람 역시 꿈을 꾸는 상태로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이 사람의 사고는 알고 있는 자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를 인식이라 함이 옳겠으나, .”(국가 5476c-d) 이렇게 말하면서 국가 6권부터 7권에 걸쳐 세 비유를 통해 인식과 좋음의 이데아의 관계를 설명한다.

 

첫 번째로 태양의 비유는 볼 수 있는 힘인 시각(태양의 비유 내에서 청각과 그 밖의 감각에 대해서 언급 했지만 주로 시각에 관하여 얘기했다), 시각의 대상 그리고 빛을 인식, 형상, 좋음의 이데아로 비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각에 해당되는 인식과 대상에 해당되는 좋음의 이데아(형상) 외의 형상들에 대해서 그것이 좋음의 이데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상과 시각이 있어도 빛이 없다면 볼 수 없는 것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형상을 인식하게 하는 최상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을 주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라고 선언하게. 이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지만, ‘인식되는 것이라 생각하게나.

 

반면에 이 둘이, 즉 인식과 진리가 마찬가지로 훌륭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이 이데아는 이것들과도 다르며 이것들보다 한결 더 훌륭한 것이라 믿는다면, 자넨 옳게 믿게 되는 걸세.”(509a) 두 번째, 선분의 비유는 한 선분을 명확함의 정도에 비해서 더 명확한 것을 더 길게 나누어 보이는 부류(의견, 판단과 관련된 감각적 대상들)’지성에 알려지는 부류(지성과 관련된 형상들)’를 위치시키고 나누어진 부류를 다시 앞에 경우와 비율로 둘로 나누어서 대상에 따른 *생각의 상태(플라톤은 이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필자가 따로 용어를 만들었다. 그 이유는 생각과 관련해서 우리가 단순히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에게는 형상을 알게 하도록 것으로써 의견과 판단과는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의견 체계, 판단 체계, 인식 체계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이렇게 이름 붙였다.)를 위치시킨다.

 

이 비유에서 그의 인식 체계는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의견, 판단의 영역에서 상(), 그림자에 관련한 생각 상태를 상상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 및 인공물들에 관련한 것을 믿음, 확신으로 나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성의 대상들에 그의 앞선 주장들처럼 단순히 형상을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기하학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와 도형들을 탐구하는 추론적 사고를 지성의 영역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그것이 형상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명백한 것들로서, 자신들에게도 남들한테도 더 이상의 아무런 설명도 해 줄 필요가 없는 것’(510c)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추론적 사고를 따로 분류 했는가 이다.

 

수나 도형 그 자체는 형상이기에 그것을 탐구하는 생각 상태는 인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지만 그것에 대한 어떤 추가적 설명도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태양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상을 탐구하는 것은 인식이지만 이 비유에서 인식은 그 어떤 감각적인 것도 전혀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이것들을 통해서 이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형상들에서 또한 끝을 맺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마지막으로 동굴의 비유에서는 태양의 비유에서와 같이 태양이 좋음의 이데아로 비유되지만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익숙해짐이라고 생각한다.

 

동굴 안에서 불빛에 의한 그림자만 바라보던 사람은 그 반대편의 불빛을 볼 때,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마주할 때 바로 그 순간의 눈부심 때문에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고 고통 때문에 원래 있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좀 더 높은 경지의 것을 보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515e-516a) 이는 형상을 탐구하기 위한 인식을 형성하고 그것을 단련하는 어느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익숙해짐의 시간이 충분치 않다면 그가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는가?”(516e-517a)라고 말한 것처럼 형상을 탐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현혹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이 익숙해짐이 필요한 사람들은 묶여서 그림자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다.

 

그가 국가의 다른 부분에서 말한 어릴 때부터 좋은 자질을 천성으로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비유가 다른 비유나 국가의 다른 부분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단순히 인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특징들을 기술하는 다른 부분들보다 제대로 보지 못하는(인식하지 못하는)사람들의 교화(?)를 대체적으로나마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인식 또는 앎은 그가 주장했듯이 철학(전공과목) 그 자체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그러니 우리는 철학자도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지혜는 욕구하되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하는 자라고 주장하지 않겠는가?”(475b), “참된 철학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하네.”(475e),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반면에,”(484b),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향과 관련해서는 이 점에 대해서, 즉 이들은 언제나 있으며 생성과 소멸에 의해 헤매게 되는 일이 없는지 존재를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는 배움을 언제나 사랑하는 데 대해서 우리가 합의한 걸로 해 두세나”,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온 존재를 사랑하여, 그것의 작은 부분이건 큰 부분이건 또는 그것의 귀한 부분이건 하찮은 부분이건 간에 자진해서는 포기하는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합의한 걸로 해 두세”(485a-b), 등등 인식과 철학을 동등하게 보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전공과목은 있는 것 그 자체, 즉 형상과 그 형상을 나누어 가진 부분들 탐구하며 더욱이 탐구함에 있어서 이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직접적으로 철학에 대해서 설명했지만 지금 대학교에서 전공과목으로서 철학은 많은 분야가 있다. 그가 탐구했던 것과 같은 부류의 것을 탐구하는 형이상학, 인식의 기원과 본질, 인식 과정의 형식과 방법 따위에 관하여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부문인 인식론, 과학과 일상적 언어의 여러 개념이나 명제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분석철학, 그리고 정치 경제 환경과 생태 사이버 성 등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서 탐구하는 실천철학 그리고 역사 순서에 따른 철학을 탐구하는 역사철학 이 현재 전공과목으로서의 철학의 전반적인 분야이다.

 

또 다시 플라톤의 인식체계 속에 이런 철학 분야를 위치시켜 본다면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인식과 관련된 것으로, 분석철학은 추론적인 사고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천철학을 어디에나 위치시켜야 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지만 필자는 그것이 감각적인 대상은 아니지만(정치나 경제 또는 성이라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기에) 감각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러나 이것이 기하학 적인 것도 아니기에 믿음(확신)과 추론적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 상태라고 보았다. 선분 위에 위치시켜 본다면 그것은 선분의 딱 중앙이 아니라 지성의 부류를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그 비율은 따지지 않기로 하고) 제일 왼쪽에 위치시키면 좋을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역사철학은 탐구 대상의 성격상 플라톤을(그가 서양 철학의 지대한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그저 여러 철학도들 중 한명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보았던 이론철학과 실천철학도 이 역사철학의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인식 체계를 잣대로 어디에 위치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플라톤, 국가政體.박종현 역

플라톤, 메논.이상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7명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