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uments

YK,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1차)

MarvelKim 2019. 4. 7. 13:40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비판과 그 이후의 자연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철학자들(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만 파르메니데스(B.C515?~B.C445?)가 그 이후에 영향을 미친 자연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철학자들의 계보를 따지자면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다원론자나 원자론자들 외에도 중세의 자연철학,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철학과 더불어 칸트의 자연철학까지 제한된 용지 내에서 모두 다루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을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로 한정하여' 살펴보도록 하고 더불어 플라톤의 자연철학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도록 한다.

 

*참고문헌

프리도 릭켄. 고대 그리스철학김성진 역

W.K.C. 거스리 희랍철학 입문박종현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7명 옮김

이상인. 진리와 논박

Parmenides Fragment: Translation 'ON NATURE'

 

 

목차

1.파르메니데스(3)

밀레토스 학파(더불어 그 이전 철학자)와 구분되는 그의 사유의 길(3~4)

있다(estin)’의 주어와 서술적 의미(4~5)

운동에 관하여(6~7)

 

2.밀레토스학파에 대한 비판(7)

 

3.이후 자연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8)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1.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515?~B.C445?)

그는 이전까지 의견과 진리를 구분하지 않는 데에서 로고스를 통해 의견과 진리를 구분할 것을 주장했다.(그대는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 설득력 있는 진리의 흔들리지 않는 심장과, 가사자들의 의견들을) 즉 이제는 이야기(신화나 시문학 또는 산문)를 통해서가 아닌 논리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이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르침을 여신을 통해 서사시의 가 전달받는 방식으로 전하는데 이는 가히 모순적이라 할만하다. 왜냐하면 담고 있는 내용은 추론적이라 불릴지 모르지만 내용의 틀은 신화적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적 근원을 상정한 이들에게 철학자라는 이름을 주었지만 그들 또한 근원을 신격화 하거나 근원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 신화적 요소를 많이 띄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신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 물론이거니와 파르메니데스 그 또한 그런 관습에서 크게 못 벗어난 듯 하고 그 당시에 신화적 요소를 내포해야만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런 모순은 뒤로 하고서라도 그의 가름침은 의미가 있다. 그의 탐구 방향을 결정하는 논증의 목표는 단편시의 시작부터 분명하게 제시된다.

 

, 이제 내가 말할 터이니, 그대는 이야기를 듣고 명심하라,

탐구의 어떤 길들만이 사유를 위해 가능한지.”

 

그는 합리적인 탐구의 길을 찾고자 하고, 특히 사유와 인식을 위해 가능한 탐구의 방법을 찾고자 한다. 그의 출발점은 존재론의 문제도 아니고 우주론의 문제도 아니며, 바로 사유와 인식의 문제, 더 정확히 말하면 인식을 위한 탐구의 문제이다. 무엇이 진리의 인식과 설득이라는 사유의 목표를 보증할 수 있는 탐구의 길인가? 무엇에서 출발할 때 사유는 인식과 진리의 설득을 향한 자신의 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고, 무엇에서 출발할 때 사유는 결코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없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도대체 무엇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있고, 무엇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는가? 이것이 그의 질문이다. 그의 단편에 담겨있는 논증은 전적으로 사유와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그 가능성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논증 목표가 사유를 위한 탐구의 방법적 길들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것을 언급한 뒤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중 하나는 있고(estin) 있지 않을 수 없다라고 사유하는 길로서 설득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있지 않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라고 사유하는 길로서 그 길은 배움이 없는 길이라고 나는 그대에 지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바로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인식할 수도 없을 것이고 (왜냐하면 실행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언표 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사유의 인식추구의 두 가지 길을 표명하는데, 하나는 있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길은 있는 것에 관계하는 사유의 탐구의 길이 설득의 길인 것은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고, 있지 않은 것에 관계하는 사유의 탐구의 길이 배움이 없는 길인 것은 있지 않은 것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있는 것있지 않은 것은 각기 사유를 위한 탐구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판단기준이 된다. 하지만 왜 그는 있는 것의 길이 진리설득의 길이라는 것을 논증하지 않은 채 단순히 주장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왜냐하면 있다라는 사유의 판단 속에 설득진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그것의 자명성과 필연성이 또 다른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여기서 그가 수행하는 모든 논증의 일차적 전제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논증에는 논증되어야 할 대상이 있고, 논증의 전제로서 논증의 원리가 있다. 논증의 원리는 그 자체가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논증은 오직 논증의 원리가 전제될 때 비로소 실행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논증에서 논증의 원리와 논증의 대상이라는 두 가지 것이 혼동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있다(estin)’에서 주어가 명확히 표현되어 있지 않고, 다른 어떤 술어 없이 단독적으로 사용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 역시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사유를 위한 탐구의 방법을 탐색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논증의 목표와 과정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있다의 주어를 찾고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먼저 주어에 대해서는 있다에 관한 설명이 나와 있는 부분을 종합하여 알 수 있다.

 

<1>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하다.”

 

<2>“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먼저 <1>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있는 것’(여기서는 있어야만 하는 것)에 범주에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이 포함된다는 것이고 따라서 있다의 주어는 말과 사유의 대상이 된다. <2>에서는 있는 것자체에 대한 성질이 나와 있는데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자체가 있는 것이 된다. 그의 핵심이 되는 주장인 단편2와 이것들을 종합해 볼 때, ‘있다의 대상은 그 성질에 있어서는 <2>를 따라야 하고 그 목표는 말해지고 사유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있다의 서술적 의미는 무엇인가? 'estin'에 대한 기존 번역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있다라는 실존적번역, ‘~이다라는 서술적번역 그리고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라는 규정적번역에 대해 살펴보자.여기서 논의 되고 있는 있다는 단편23행의 것과 더불어 단편61행에 나오는 있는 것은 있다(eon emmenai)’이다.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만 한다."

) chre to legein te noein t' eon emmenai

)It must be that what is there for speaking and thinking of is; for [it] is there to be,

 

이에 상응해서 'eon emmenai'가 번역될 가능성은 세 가지 이다.

a. 실제로 있는 것이 사유 가능하다.

b. ~인 것이 사유 가능하다.

c.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 어떤 규정된 것인 것이 사유가능하다.

 

실존적 번역에 따르면, 말함과 사유는 오직 실존하는 것에 대해 성립하고 실존하지 않는 것은 말함과 사유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잠시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동물들을 생각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정확한 원을 그릴 수는 없지만(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것으로부터 그것이 확고한 진리로서 사유되거나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어떤 것의 실존이 그것에 대한 사유와 인식의 진리확실성을 보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실존적 번역은 ‘estin’있는 것이 있다는 형식논리적으로 참이고 필연적인 명제로 봄으로써 이런 불합리를 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사유의 논리적 진리를 존재론적 진리로 변형시킨 철학자로 해석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eon emmenai’로서 ‘estin’ ’있는 것이 있다는 동어반복전인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있는 것만이 사유 가능하다는 인식론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서술적 번역에 따르면, 말함과 사유는 오직 ‘~인 것에대해서 성립하고 ‘~이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estin’은 주어와 술어를 결합하는 논리적 계사로서 어떤 내용도 갖지 않는 형식적인 연결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estin’의 개념으로부터 그에 함축된 많은 것을 연역하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estin’은 결코 내용 없는 공허한 개념이 아니다. 게다가 ‘estin’이 논리적 연결사로서의 역할에 제한된다면, 우리는 ‘~이지 않은 것’, 즉 주어가 술어와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유 불가능하다는 전적으로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다. 또한 필자의 생각에는 그가 단편2에서 말했듯이 사유를 위한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을 말할 때 , 그리고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서술적 번역을 따르면 옳지 않다고 본다.

 

규정적 번역에 따르면, 말함과 사유는 오직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있는 것’, ‘(어떤 것으로 규정된 것)인 것에 대해서 성립하고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 ‘(어떤 규정된 것)이이지 않은 것은 사유를 위해 불가능하다. 이 번역은 앞의 번역이 직면했던 불합리한 귀결들을 피할 수 있다. 첫째, 허구적 동물이나 완벽한 원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 개념들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 어떤 규정된 것이라면 그것들은 언표와 사유 가능하고, 만약 그것들 각각에 부합하는 어떤 규정성도 없다면 그것들은 말함과 사유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떤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말함과 사유의 전제로서 탐구의 출발점에 정립된다면, 우리는 이 전제에 의거하여 그에 대한 인식의 정확성과 진리성을 판단할 수 있다. 둘째, 규정적 해석 하에서 ‘estin’은 우리말로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있다‘(어떤 규정된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 전자의 있다가 실존을 의미하는 완전동사가 아니듯이(아마도 무엇을 규정할 때는 한 존재 자체의의 가능성만을 고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후자의 ‘~이다도 공허한 논리적 계사가 아니다.(아마도 무엇을 규정함이 전제되어 있기에 아무런 의미 없는 순수한 연결사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후자의 문법적 역할을 기존의 언어분석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는 없지만, 횔셔가 지적하듯이, 그리스인들은 ‘einai’를 어떤 사태가 정말로 바로 그것이다라는 화자의 인식적 태도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AB이다에서 이다AB결부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A‘B인 것으로 화자에 의해 사유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술어 B를 생략하고 단적으로 ‘estin’이라고 말할 때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는 것은 주어 A에 술어 B가 부가되더라도 A는 오직 B‘인 것’, B규정되어 있는 것으로서 비로소 말과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된 번역을 벗어나서 필자의 생각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담겨있는 'estin'‘-이다로 통일해서 생각하면 될 것 같다고 보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다라고 하는 서술어는 주체와 객체의 존재가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안에 존재의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단편들이 사유의 추구를 위한 길을 위해서는 배움이 있어야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에 단순한 존재의 있음보다는 존재의 관계를 상정해야 성립하는 ‘-이다로 보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추론을 위해서는 어떤 단어를 익혀야하고 익히는 데에 있어서는 대상의 있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다보다 ‘-있음이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파르메니데스는 단어 자체보다는 사유의 방식에 초점을 두고 있기에 필자는 ‘-이다가 더 의미 있다고 보는 바이다.

 

또한 그는 운동에 대해서 단편8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운동은 불가능한 것이며, 실재 전체가 하나의 단일하고 부동. 불변인 실체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 이라는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있는 것 이외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존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변화된다는 것은 어떠한 성질이 다른 것으로 바뀐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성질이 있지(~이지)않은 것으로 됨을 뜻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의 원천인 운동은 있는 것이 그것 아닌 것으로 하게 함을 뜻하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고 더불어 생성과 소멸은 있지 않은 것이 된다. 또한 운동을 하기위해서는 아무 것도 없는 공간으로 있는 것이 이동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세상은 꽉 차 있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이자 있는 것의 종류에는 사유되는 것을 놓고(영원하고 불멸한 것이라는 이유에서 있는 것이라 불렀고, 자신과 동일하며 차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불렀는데), 질서 없이 움직이는 종류에는 감각되는 것을 놓는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실재가 감각에 의해서는 지각될 수 없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가 실재와 감각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2. 밀레토스 학파에 대한 비판

이와는 반대로 밀레토스 학파는 근원을 물, 무한정자, 공기처럼 감각될 수 있는 것에서 찾았다. 무한정자(아페이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감각되지 않지만, 아낙시만드로스가 아페이론을 다른 대상을 만들어내는(엄밀한 의미에서 아페이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만듦의 개념이 아니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유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만듦의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근원으로써 상정할 때 그것은 이미 사유 자체라기보다는 감각되는 대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그것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물보다는 옅으나 공기보다는 더 진한 물질로 이루어진 물체로서 생각되었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는 밀레토스 학파처럼 단순히 변화의 세계 속에서 영속적이고 동일한 어떤 것을 찾지 않고 인식의 조건들 자체를 탐구했다는 사실이 실은 그를 학으로서 철학의 시원과 근원의 개척자로 만들었다. 덧붙여서, 근원이나 근원적인 힘을 물체에서 찾는 밀레토스 학파는 어떤 힘을 의인화 시키는 신화적 서사에서 단순히 신격화 되는 존재를 인간이 아닌 물체로 바꾸기만 했다고 보는 바이며, 이런 점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생성하는 근원보다는 근원자체를 탐구하는 사유의 방법을 개척한 장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이후 자연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은 그 이후에도 많은 자연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서는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에게 준 영향을 살펴보도록 한다.

 

먼저 엠페도클레스는 파르메니데스와 마찬가지로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될 수 없으며 비존재로 소멸할 수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근원적 질료를 네 원소 즉, , , , 공기로 두고서는 그 원소들은 그 고유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의 혼합과 분리를 통해서 다른 부차적인 것들이 나왔다고(여기서 나왔다는 개념은 생성의 개념이 아니라 네 원소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성질들의 결합의 의한 만들어짐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보며또한 네 원소가 결합하는 원리를 사랑과 불화라고 보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것에 여러 가지를 두면서 그것들의 원리가 되는 요소(원소)를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으로 상정하는 데에서 그리고 두 원소 중 우세한 것에 의해 인식이 일어나며 이것도 어떤 비율을 필요로 한다는 데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본다.

 

아낙사고라스도 생성과 소멸을 부정하면서 근원의 영구한 존속을 주장하는 데 엠페도클레스와 다른 점은 그가 근원들을 무한정한 씨앗으로 보며 그것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생기고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다르게 그는 지성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섞인 것들이며, 이것만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물질이며 미세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을,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제어할 수 있다고 했다.필자의 생각에 이 부분은 그가 지성을 특별하게 놓는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가 지성과 감각을 구분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본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의 개념을 차용하긴 하지만 개념이 가리키는 바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꽉 찬 것과 허공을 원소들이라 말하며, 전자를 있는 것, 후자를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이것들 중에서 꽉 차고 단단한 것을 있는 것이라고 하고, 비어 있고 성긴 것을 있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허공 자체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허공의 상태를 인정함으로써 움직임의 원인을 설명했다. 또한 꽉 찬 것들을 이루고 있는 근원을 각기 다른 성질을 가진 원자라고 함으로써 허공 때문에 생기는 운동으로 인해 성질이 다른 원자들이 만나게 되고 또 떨어지게 됨으로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들의 원소 개념은 파르메니데스가 감각적인 것 밑에 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한정적인 원소와 허공을 상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르메니데스가 있는 것은 하나라고 하면서 또 거기서 지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하나와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여러 가지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감각과 사유의 구분을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플라톤에 이르러 이데아의 개념을 통해서 감각과 사유의 완전한 구분이 이루어지는데,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이데아의 세계와 연관시키면서 감각되는 것들은 모두 허상이며 올바른 사유를 통해서만 그 세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뿐이다.”라고 표현하는 데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