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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 비둘기를 그리려면 비둘기 목을 비틀어야 한다

MarvelKim 2019. 4. 7. 11:59

 

 

비둘기를 그리려면 비둘기목을 비틀어야 한다.”

-피카소-

 

 

 

 

 

피카소는 평생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살아간다 그의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체주의의 큰 발전을 기준으로 하여 그의 일생을 설명하고자한다. 1881년에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미술에 특히 재능이 있었으며 감수성이 풍부했다. 이는 화가인 아버지의 유전적 영향과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미술에 흥미를 가졌고 또한 어머니의 혁명가적 기질을 물려받은 그는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소년이었다. 이런 피카소는 금방 아버지를 뛰어넘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태를 유심히 관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미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것은 그의 누이 콘치타가 14살 때 죽은 일 때문이다. 피카소는 죽어가는 누이를 보면서 신께 누이를 살려준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겠다고 했지만 신은 누이를 살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피카소는 하늘조차도 그가 그림 그리기를 원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평생의 직업으로 삼는다.

 

(전달축) 그는 미술을 더욱 깊이 배우기 위해서 20살에 파리로 간다. 이 때부터 그의 장년기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창의적 활동을 위한 거시적 환경)입체주의 초기작인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리기 전까지의 그의 예술적 사조는 두 갈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첫 째는 청색시대이다.

 

이 시대(1901-1904)에는 어둡고 칙칙한 느낌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나타내고 이는 아마도 그의 친한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죽음 때문에 이런 그림을 주로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그림은 장밋빛 시대(1905-1906)에 들어서면서 주제나 색체가 더욱 밝아졌는데 이 시기에는 주로 곡예사 가족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장밋빛 시대의 그림에서도 안정되고 평화로울 정도의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그의 가난한 삶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의 그림은 그가 미술계에 들어서기 전부터 팔리기 시작했지만 1915년까지 빈궁한 삶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다. 이시기는 입체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기도 한데 그가 1906년 고솔(gosol)로 여행을 가면서 어릴 때부터 흥미를 가졌던 형태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1907년 아비뇽의 여인들을 발표한다.

 

 

입체주의 운동은 1900년부터 1914년까지 미술의 혁신을 이끄는데 피카소의 역할은 이 입체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최초의 Cubism이 탄생하는 것은 1908년 마티스가 조르주 브라크의 <에스타크 풍경>을 보면서 입체(큐브)덩어리들의 모임과 같다고 평하면서 나온 말이지만 그 초기 계보는 세잔느의 입체주의적 풍경화 그림을 따른다. 어떤 면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창의적 발전을 이끌었는지는 그의 <아비뇽의 여인들>의 주제가 말해준다.

 

이 그림 이전 입체주의적 그림은 풍경화가 전부였지만 피카소는 사람을 주제로 입체주의를 나타내면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가면과 같은 형상을 통해 여자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런 그림들은 당시의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피카소가 이런 형태의 그림에 빠져들게 된 것은 그가 내가 세잔느를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주장했듯이 세잔느의 입체적 풍경화는 그를 자극했다.

 

그 당시 입체주의 미술은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비평가들은 이 예술적 사조를 기괴한’, ‘야만적인’, ‘우스꽝스러운’, ‘고의적으로 충격을 주는등의 언사를 사용하면서 평범하고 무가치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피카소의 오랜 친구인 아폴리네르는 옹호자의 역할을 했는데 그는 여러 편의 글과 책을 써서 입체주의 미술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이 운동의 중요성과 입체주의를 창시한 두 화가의 업적을 옹호했다. 그가 지적했듯이 입체주의는 미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념을 표현했다. 여타의 공감적인 평자들은 입체주의 미술이 과학을 예술의 도입한 사조이며 최초의 객관적인 예술이고 대상 사물의 구조를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양식이라고 서술했다.

 

(PD진입과 막아서는 F 그리고 조력자), 이런 아폴리네르와 같은 조력자와 더불어 그의 입체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것은 입체주의의 시초이자 그의 친구인 조루즈브라크이다. 1908년부터 14년까지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미술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사적인 여러 부분들까지 나누었다.

 

선의의 경쟁자로서 브라크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브라크와의 공동작업 시기의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3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전기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가 있다. 분석적 입체주의는 전기 입체주의에 비해서 굉장히 많은 부분들과 조각들을 통해서 형태를 나타낸 것이고 종합적 입체주의는 한 형태를 많은 조각으로 나누어 그린 분석적입체주의에 비해서 다른 여러 부분들을 통해 종합된 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이후에는 입체주의에 많은 화가들이 뛰어들어 이 예술적 사조를 개척했기에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그 이전까지라고 할 수 있다.) 1915년부터 10년 동안은 피카소는 그의 명성을 통해 얻어진 부를 이용해 부르주아적인 삶을 누린다.

 

 

이 때를 피카소의 신 고전주의시기라고 하는데 이 때에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 양식의 작품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렸다. 이후 1926년부터 10년 동안은 본처와 바람난 애인과의 싸움과 같은복잡한 가정생활이 그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 시기에 그는 여인을 괴롭히는 신화적 동물인 미노타우로스를 주제로 기괴한 그림들을 그렸다. 이런 그림들이 내포하는 폭력적 파괴적 양상은 그의 가정생활에 대한 불만과 그런 생활 속에서 여인들은 피카소 자신을 위해 희생할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노년기의 그림은 전쟁의 비참함을 표현하거나(<게르니카>,1937) 거장들의 작품들을 리메이크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노년기에 다른 창조적인 화가들(노년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활동을 했던 리히터)과 비교 해보았을 때, 피카소는 늙어서 창의적 열정을 불태웠다기보다 단순히 그가 젊어서 얻어놓은 명성을 구실로 그저 입체주의적 그림들을 기계적으로 생산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