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K, 푸코의 나 되찾기
1. 들어가는 말
앞서 제출했던 푸코 관련 보고서에서 가장 미진했던 부분이 바로 그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었는데 논평 중 가장 많이(사실상 전부) 지적된 부분 또한 같았다. 푸코의 신화세계(고전시대)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논의되어야 할 것은 그가 고고학과 계보학을 통해 밝힌 권력 담론 안에서 과연 어떻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앞선 보고서에서는 ‘푸코가 말하는 권력 담론 아래에서 과연 개인 또는 개별 주체들의 의미 있는 저항이 불가능하며 이러한 점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술했으나 그것은 오해였다. 그의 작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마지막 시기에 가서가 아니라 작업 초기부터 자연스러운 광기를 격리시켜온 사회, 그러한 측면에서 사회의 거대한 축인 과학적 담론에 대해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대한 탈출구를 마련한다.
“그는 『말과 사물』에서 문학은 과학적 담론들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담론들까지 규제하는 질서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일종의 대항-담론’을 형성하였다고 기술했다.”
(후기에는 방법의 전회가 이루어졌지만) 그가 말하는 담론은 주체를 일정하게 규정하는 틀로서 막강한 것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고 완결된 것으로서 그 안에서 어떠한 반동적 에너지도 형성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권력 담론이란 관념론자들의 ‘개념’처럼 영원불변해야하고 변질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미 그것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반증되었다.
*[자신의 역사 연구들을 고고학으로 불렀던 시기, 『감시와 처벌』로부터 시작되는 계보학적 시기, 마지막으로 고대의 윤리 연구를 통해 윤리적‧미학적 주체에 관해 말하려 했던 시기로 나뉜다.]
그러나 푸코 자신은 ‘담론’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중심의 담론’의 부정적 특성을 비판하고 그 안에서 소외되는 인간 본연의 자연성(광기)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푸코는 이러한 이성 중심의 권력 담론의 특성을 바꾸기 원했지만 무력을 통한 정치 혁명이 아니라 개인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데, 미학과 윤리학의 상호 공존이 이루어지는 고대 그리스 문명을 모델로 하여 몸의 미학, 몸의 윤리학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 그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는 신화시대 또는 고전시대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이상사회로의 이행을 위해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논의해보고자 한다.
2. 신화세계/고전시대
푸코의 신화세계(고전시대)란 다른 것이 아니라 로고스(이성)와 히브리스(몰-이성, 열정)가 서로 억압함 없이 어우러진 세계를 말한다. 이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삶과 아폴론적 삶의 조화와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발현함으로써 초인이 되길 희망했고 그런 측면에서 그의 주체는 개인-주체적 측면보다는 힘 관계가 발현되는 조직 안에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도 물론 담론 안에서의 힘 관계들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런 힘 자체들을 해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담론 안에 있는 인간 자아의 변화를 촉구한다.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태를 지휘하고, 결정하려고 노력하는 데 쓰이는 수단으로 힘 관계들이 이해된다면, 힘 관계들을 갖지 않는 사회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문제는 힘 관계들을 해체하여 완벽하게 투명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유토피아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니라, 지배를 최소화하면서 이러한 힘의 유희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할 요소들이 되는 법의 지배, 관리 기술 그리고 윤리, 도덕적 기품, 자아의 실천 등을 인간의 자아에 부여하는 일이다.”
즉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지 않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정치 혁명이 아니라 스스로 윤리적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윤리적 주체란 수동적 주체에서 능동적 주체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 만든 규범도 아니면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는 자기모순의 종속적 주체였다. 이 종속적 주체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도덕규범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이는 어떠한 외적인 가치나 원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그 주체만의 도덕규범을 정립해 나가는 윤리적 주체이다.
그렇다면 윤리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즉, 그동안 소외된 ‘나’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푸코는 ‘자기배려’를 제시한다. 그가 주목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정치가와 철학자들은 내적인 훈련과 성찰을 통해 참된 주체를 정립했다. 그들은 개인의 윤리를 발전시켰고, 자신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존경을 자아낼만한 것으로까지 변화시켰다. 푸코는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을 몸(성적 신체)에서 찾았다. 중세 시대부터 성적 원초성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켜 성적 규범에 따라 끊임없이 억압했다. 현대에는 성 억압을 자본의 성장 아래에서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몸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이러한 신체의 무정부주의적 창조성을 활용해 억압적인 담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해야 할 대상이며, 푸코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적 신체는 그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즉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의 소유자로서 그것의 창조성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미학적 주체(윤리적)가 되어야 한다. 즉, 자기포기를 통해 신의 구원 또는 자본의 성장으로 나아가는(울 권리도 박탈당한)슬픈 주체에서 자기배려를 통해 아름다운 자신으로 나아가는 미학적(윤리적)주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배려는 단지 몸의 쾌락을 좇아 살면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타율적 규범으로부터 일방적 억압받는 상태보다 나쁜 것이다. 이성만을 필두로 한 사회의 발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성 없는 사회는 오히려 퇴행만이 있을 뿐이다. 이성 중심의 거부는 이성 없는 몸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과 육체의 적절한 조화이다. 푸코는 그 연장선상에서 『성의 역사』에서 그리스 사회의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 철학의 긍정성을 붙들려고 한다.
“원래 고대의 문명은 육체를 저주하거나 무시하는 문화가 아니라 육체와 함께 하는 영혼을 추구한 문화였는데, ㅈ우세 기독교 문화가 영혼을 붕괴시키도록 만들었다. 스토아의 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그리스인들이 가진 존재미학의 두 가지 변종이며, 미학과 윤리학이 상호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생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점이 그리스 문명의 장점이며, 이것은 오늘날 다시 키워져야 한다. 푸코는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미학적 윤리학과 미적-윤리적 주체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3. 결론/추가논의
푸코의 권력 담론은 영원 불가능한 막강한 힘의 집약체가 아니며 힘이 있는 곳에 항상 저항이 있다.*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에 대한 오해였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정치 투쟁이라기보다 몸의 투쟁, 미학 투쟁이며 이는 자기배려를 통해 가능하다.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지닌 몸 그리고 그런 몸의 열정(히브리스)이 소외되지 않으면서 이성(로고스)과의 조화를 이룬다면 미학적(윤리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저항의 존재는 다양한 저항 점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것들은 힘 관계에서 반대자, 표적, 지원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다루어진다. 이러한 저항 점들은 힘의 연계망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위대한 거부를 위한 유일한 장소, 반란의 정신, 모든 모반들의 원척, 혹은 혁명의 순수 법칙이란 아예 없다. 오히려 다양한 저항들이 있으며, …”]
4. 참고 문헌
『HOW TO READ 푸코』, 요하나 옥살라 지음, 홍은영 옮김. 지식하우스. 2008
『푸코&하버마스』, 하상복 지음. 김영사. 2009
『성의 역사 2』, 『성의 역사 3』, 미셸 푸코 지음, 이혜숙‧이영목 옮김. 나남. 2004
<상상과 철학 상담>(김석수 교수님), 2015. 2학기. 수업자료